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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뭉클한 진주

100년 만에 드러난 진주성...‘아직도 미지의 세계’

by 지역쓰담 2018. 12. 8.

진주시 도심 한가운데 나타난 진주성 성곽 

- 발굴할수록 ‘아직도 미지의 세계’


나의 발밑에 대사지가 있고옥봉천이 있고성곽이 있었어요오랜 세월 성곽을 쌓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고 망루에서 긴 밤을 새던 백성들이 있었어요내가 사는 이곳은 이미 오래전 죽은 그들이 살았던 마을이었고 그들이 묻힌 무덤이었어요.

나는 때로는 성곽을 밟고 섰고나는 때로는 대사지를 훌쩍 건넜고영문도 모를 소리를 질러대며해석불가한 꿈을 꾸기도 했어요성곽은 무너졌다가 쌓이기를 거듭했고 그때 나의 아버지는아버지의 아버지는 그 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여러 날을 깨지 않았어요성문 앞에서 엎드려 구걸을 하던 내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도 또 여러 날 내 불우한 꿈속에서무너진 성곽 밑에서 어머니가 절뚝절뚝 걸어 나왔고백정 아버지가 산 밑 향교에 고기를 대어주고 돌아오며 옥봉천그 샛강 얼음을 깨고 피 묻은 신팽이칼을 씻었고굶주린 어린 동생들은 물가 용왕 젯밥을 주워 먹다가 물길에 휩싸여 남강으로 사라졌어요.


이것은 내가 사는 도시 땅 밑에 묻힌, 한때 영화로웠던 옛 진주성 이야기랍니다.

 


진주성 이야기

2018년 중반 도심 한가운데 땅 밑에서 100년 전 성곽 원형 그대로가 발견됐습니다. 진주시에서 지하주차장을 만들고 진주대첩 기념광장을 조성하겠다는 곳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 앞 오래된 동네였던 이곳 골목에는 뜨내기 일용직들이 달방으로 묵을만한 낡은 집들이 있었고, 남강변에는 장어구이식당들이 즐비했습니다. 진주시가 하겠다는 진주대첩광장조성 사업이 시작되면서 거기 30년여 된 장어구이식당들은 진주성 공북문 앞이거나 어딘가로 이전을 했고, 거기 뒷골목 띄엄띄엄 남아있던 낡은 여인숙과 선술집은 쇠락한 마지막 모습을 길게 보여주며 굴삭기 아래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땅 속에서 높이 몇 미터 이상 되는 성곽이 무너지지 않고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니, 모두 놀랐습니다. 마치 오래된 지하세계를 발견한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환호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경남 진주 원도심에 있는 진주성 이야기입니다. 진주성은 1963121일 사적 118호로 지정됐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존하는 진주 내성을 두고 진주성이라 했지요. 진주성은 도심을 타고 흐르는 남강과 함께 수십 년 동안 도심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후11시가 되면 성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지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진주성 안에는 집들이 빼곡했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동무는 성 안 북장대 근처가 집이라 우리가 그 집에 놀러갈 때는 성곽 담벼락을 다람쥐처럼 장난치듯이 오르락내리락 했답니다.

진주성은 남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두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제법 규모가 있는 석성이었습니다.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고, 이후 석성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진주 출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하륜(河崙)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에 따르면 진주성은 1377년 다시 돌로 쌓아 1380년에 완공했습니다. 조선 초에도 진주성 개축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91(선조 24)에는 외성을 축조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고 1603년 당시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영을 진주로 이전해옵니다. 이때 진주성을 다시 축조해 병영으로서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영조때 작성된 여지도서 (輿地圖書)’에서 볼 수 있는 진주성입니다.



이때 진주성은 1605년 축성 완료 이후 내성과 외성을 나눠 기능을 분리했습니다. 진주 내성은 그 둘레가 1.7였으며, 진주 외성은 둘레가 4에 이르렀습니다. 내성은 현재 공북문을 내북문으로 하고 북장대를 두었고, 촉석문을 내동문, 촉석루를 남장대로 두었으며 서쪽에는 서장대를 두었습니다. 진주 외성에는 서문, 구북문, 신북문, 남문이 있었습니다. 외성은 조선시대까지 서장대 아래 나불천에서 대사지(大寺池) 동쪽을 에둘러 현재 진주초등학교, 진주교육지원청, 진주경찰서, 중앙로터리, 장대동 제중의원과 어린이 놀이터, 동방호텔 일대를 경계로 했습니다.

진주는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습니다. 일제는 도시계획을 새로이 한다며 진주 내성 촉석루 뒤에 일본 신사를 건립했고, 진주성 북쪽 연못인 대사지(大寺池)를 매립하여 진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 터)와 진주경찰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진주 외성 일대를 허물고 일본인들 거주지 및 상업시설을 만들고 땅을 파헤쳐 수도시설을 넓혀갔습니다. 그때 진주 외성은 무너지거나 묻히고 더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교회를 짓고 영화관을 짓고 식당을 짓고 도로를 닦았습니다. 진주 외성과 남문과 용장대는 점차 역사와 전설 사이를 오갔습니다.

진주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진주성은 이렇게 일제강점기 동안 원형을 알 수 없도록 허물어지고 해체됐고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서도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1969년부터 제1차진주성 복원사업이 추진돼 1972년에는 촉석문을 준공하였고, 1975년에는 성곽 보수를 완료하였습니다. 2차는 진주성공원화사업으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성 안의 민가 751동의 철거를 추진하여 성안 마을을 없애고 성내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했습니다. 1992년 이후는 제3차 사업으로 성 외곽을 정비했고 마침내 현재 진주성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현재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의기사·국립진주박물관·창렬사·호국사, 그리고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등이 있습니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신사가 들어섰던 자리입니다.

현재 진주성에는 촉석루와 의기사, 서장대·북장대와 창렬사, 호국사 그리고 진주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이든 진주성 안을 거닐다 보면 고목이 된 팽나무, 회나무, 참나무들에 저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가을이면 어디든 자리를 깔고 앉고 싶습니다. 티 없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방팔방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끝 간 데 없이 풀린 가을 볕살만큼 자유로워집니다.

 

진주 외성 성곽은 어떻게?

확인된 성벽은 길이 약 100m, 너비 6~7m에 최고 높이는 4m 가량입니다. 외벽 축조방법은 높이 100이상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눕혀놓고 그 위에 20안쪽으로 대형 기단석을 세워 쌓은 후 작은 돌로 빈 공간을 메운 형식입니다. 이런 축조방법은 밀양읍성, 기장읍성 등과 같습니다.”

한국문물연구원 관계자의 설명은 다소 건조하고 장황했습니다

지난 1021일 진주문화연구소는 시민들과 함께 진주성을 돌았습니다. 내성을 돌고 이번에 발굴된 외성을 찾았습니다. 따가운 가을볕이 내리쬐는 도심 한가운데 발굴현장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듯합니다. 아파트를 건축하거나 도로를 닦는 개발 현장과는 또 다릅니다. 왠지 시간의 더께가 손끝에서 만져지는 듯한, 모래알이 입 안에서는 서걱대며 씹히는 듯한 그런 기분입니다.

2017년 11월 성곽 기단석이 발굴되면서 문화재청이 주목을 했고, 이어 진주시와 한국문물연구원은 지난 4월부터 정밀 발굴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놀랄 만큼 보존 상태가 좋은 원형 그대로의 성곽이 발굴됐고, 지난 911일에는 발굴 현장을 시민들에게 최초 공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날도 몰려든 시민들은 진주 외성 발굴 현장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커다란 성돌 마저 신기해했고, 출입금지 표시 노란 줄이 여기저기 쳐져 있는 사이를 조심스레 들어갔습니다.

외성은 대체로 해발 26m에서 성벽 상부가 드러나고 최하 23m까지 성벽 기단이 노출된 상태입니다. 외성의 성벽 성격으로 축조, 수축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한국문물연구원 등 조사단은 기단부와 벽석에 사용된 석재의 형태와 축조기법이 달라 크게 상-하층으로 구분되고 내벽 초층도 초축 시 성토층과 수축 시 내벽다짐층으로 구분돼 3단계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국문물연구원 중간발표에 따르면 이번에 발굴한 것은 진주 외성 남쪽 성곽으로 남강을 마주 본 형태였습니다. 성곽 원형을 보며 학자들은 어떻게 도심 한가운데 진주 외성이 땅 속에서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을까를 두고 몇몇 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한국문물연구원 관계자는 인근의 모래가 자연 범람해 성곽을 덮었고, 지대에 단차가 있어 성곽이 위치한 강변이 지금 시가지보다 저지대에 위치해 굳이 성곽을 허물어뜨리지 않더라도 평지 위로 건물을 지을 수 있었고, 발굴된 성곽의 형태가 견고해 지금까지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성곽 인근에서는 조선시대 기와, 분청사기·백자, 청자 등 개축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도 출토됐습니다.

발굴된 성곽을 보러 시민들이 자꾸 몰려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20여 년 전 언젠가 내가 보았던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가 생각났습니다. 사막 위로 햇볕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우우우 몰려든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기어 올라가던 그 행렬이 떠올랐습니다.

 

영웅과 승전 역사에 묻힌 우리를 찾아야

지금껏 알고 있던 진주성은 진주 내성이었습니다. 외성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시민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발밑이 유적지이고 역사인 것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묻더군요. 진주성은 왜 진주대첩 역사로만 기억됐을까, 임진왜란 당시 민관군이 함께 왜병을 물리친 역사만이 이곳 진주성에 깃들어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1000년 가까이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왜 자꾸 승전의 현장으로만 기록되는지 스스로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진주성을 오랫동안 연구하는 노학자 김준형 교수는 자신이 집필한 진주성 이야기에 서명을 하다가 잠시 펜을 멈추더니 아직도 진주성은 미지의 세계입니다라고 적었답니다.

그래요, 이 이야기는 한때 영화롭던 옛성에 관한 되새김질이랍니다. 볍씨 한 톨처럼 이 땅에 흩뿌려졌던 그러나 이미 오래전 죽어간 이들에게 보내는 애도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제가 연재하고 있는 월간 <전라도 닷컴>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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