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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칼럼]

지역에는 근현대사가 없다

by 지역쓰담 2019. 8. 22.

권영란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 등록 :2019-05-20 16:47

한국 근현대사는 시대순으로 엮은 국사 교과서 맨 뒷장이었다. 분량도 적었다.

학년이 끝날 무렵 진도를 한꺼번에 따라잡느라 숨가빴던 국사 담당 교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현대사는 대충 훑고 끝냈다. 달달 외우게 했던 조선시대 정치 변동과 연보를 다룰 때와는 달랐다. 근현대사는 2학기 기말고사 범위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교육과정에서 근현대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 국사 교육은 암기 과목으로서 발해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등 과거의 역사일 뿐 현재가 아니었다.나는 중·고등학교를 박정희 정권 말기와 전두환 정권 아래 다녔다. 두 정권 모두 군부를 동원해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국민을 학살했고 범죄를 저질렀다.

내 기억으로 근현대사에서 해방 후 냉전체제와 이념대립, 여순사건과 4·3제주항쟁, 보도연맹과 민간인학살, 4·19혁명, 인혁당 사건을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 당시 일어난 10·26암살, 12·12쿠데타, 5·18항쟁 등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현대사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은 스무 살 이후에야 알게 됐고 이마저도 쉬쉬하며 돌던 유인물을 통해서였고, 5·18항쟁은 수년이 지나 1989년 어느 지하공간에서 다큐멘터리 <오, 꿈의 나라>를 보면서 알게 됐다.

여전히 교육과정에서는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왜 천년, 수백년 전 건국과 권력투쟁의 역사를 가르치는 데 더 전념하는 걸까. 아직도 교과서는 일제강점기와 항일투쟁, 냉전체제와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와 산업화, 정치적 격변기 등을 거쳐온 한국 근현대사를 서울과 권력을 중심으로 크고 굵직한 사건을 기록하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대놓고 얘기하자. 그렇다면 지역 근현대사는 어떻겠는가.

지역에는 아예 근현대사가 없다. 경남에만 해도 18개 시·군이 있는데 각 자치단체와 읍면동 누리집을 살펴보면 대부분 1000년도 더 된 지역 유래와 연혁을 기술해 놓았거나 행정 변천 과정, 명칭 변경을 나열할 뿐 지역 근현대사를 밝혀 놓은 곳은 드물다. 시지와 군지에서도 근현대 지역사 기록은 허술하기만 하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 그 격동의 시대에 지역마다 동네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시기 지역민들의 삶과 생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더러 지역 언론사나 관련 연구자들이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기록할 뿐이다.

언젠가 경남 산청군 외공리 민간인학살 위령제에 온 고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아예. 다른 사람들은 갈차주지도 않는데 우리 역사샘이 이야기해 주면서 같이 가보자 하데예. 우리 동네서도 전쟁이 있었다는 게 실감 나지가 않았는데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이런 현장이 있어서 놀랐어예. 군인들이 그랬다는 것도….”

외공리 학살 사건’은 1951년 2~3월 사이 군인들이 11대의 버스에 타고 온 민간인들을 총살한 사건이다. 이곳은 2000년과 2008년 두차례 유해 발굴을 했을 뿐 진상 규명이 되지 않았고 인근 지역 주민들과 단체에서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날 학생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현대사,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지역 역사 현장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할 말이 많았던 것도 같다.우리가 배울 근현대사는 이런 것이 아닐까.

일제강점기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을 어떻게 했으며, 강제 징집되거나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실태와 참상은 어땠는지, 한국전쟁 때는 지역 어디를 폭격당했으며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1952년 처음으로 대통령 직접선거 때 지역 투표 상황은 어땠는지, 1960년 3·15부정선거와 4·19를 겪으면서 정작 지역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1987년 6월항쟁 당시 지역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등. 현재의 나로부터 먼 역사가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역사, 서울과 권력의 역사가 아니라 들으면 금방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지역 역사와 생활사이다.

이미 많은 것이 사라졌고 이미 많은 것을 잃었지만 늦지는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아온 주민들의 증언과 구술을 차근차근 받고 방치된 자료들도 한데 수집해서 기록하고…. 오늘도 지역 근현대사는 서럽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4618.html#csidx2fe67f257eb13fcba7ccb7f1734f5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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