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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가구로 살아남기 권영란 진주 전 대표 / 등록 :2019-07-29 18:11 나는 1인가구이다. 50대 여성이다. 흔히 생각하듯 이 연령대 여성에게 있을 법한 보편적 가족 형태인 남편이나 자식이 내게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상당히 불리한 조건들이다. 몇달 전 실족사고로 응급차에 실려 갔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마침 주말이었고, 담당 의사는 검진과 응급처치 뒤 월요일에 수술을 하겠다 했다. 그러고는 보호자를 찾으며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라 했다. 그때 응급실에는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섯 사람이 줄줄이 서 있었다. 담당 의사는 당연히 한명쯤은 냉큼 나설 거라 여겼겠지만 다섯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들 가운데 보호자로 나설 사람은 없었다. 일을 같이하는 동료이거나 동네 후배들이었다.“1.. 2019. 8. 22.
서울이 모르는 한국전쟁 권영란 진주 전 대표 / 등록 :2019-06-24 17:35 #1. 촉석루가 불탔고 진주성 성곽이 무너졌다. 시청도 경찰서도 시가지도 내리 폭격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진주의 상황이다. 그해 7월 말부터 9월 사이 도시는 폐허가 됐다. 그해 7월30일 ‘진주 사수’를 외치던 진주시장과 경찰서장은 시민들 몰래 진주를 빠져나갔다. 인민군이 진주 북쪽과 서쪽에서 밀려들어오자 소방서 직원, 신문사 기자들까지 다 빠져나간 뒤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민들이 피란을 가려 했으나 당시 남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거기에다 국군은 후퇴하면서 인민군의 남쪽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진주교를 폭파했던 것이다. 7월31일 인민군은 진주에 들어왔고 진주성 촉석루.. 2019. 8. 22.
지역에는 근현대사가 없다 권영란 진주 전 대표 / 등록 :2019-05-20 16:47 한국 근현대사는 시대순으로 엮은 국사 교과서 맨 뒷장이었다. 분량도 적었다. 학년이 끝날 무렵 진도를 한꺼번에 따라잡느라 숨가빴던 국사 담당 교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현대사는 대충 훑고 끝냈다. 달달 외우게 했던 조선시대 정치 변동과 연보를 다룰 때와는 달랐다. 근현대사는 2학기 기말고사 범위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교육과정에서 근현대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 국사 교육은 암기 과목으로서 발해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등 과거의 역사일 뿐 현재가 아니었다.나는 중·고등학교를 박정희 정권 말기와 전두환 정권 아래 다녔다. 두 정권 모두 군부를 동원해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국민을 학살했고 범죄를 저질렀다. .. 2019. 8. 22.
누가 지방소멸을 말하나 권영란 진주 전 대표 / 등록 :2019-04-15 16:51 “인자 다 죽고 나모는 우리 마을에는 누가 살꼬? 난중에 자슥놈들이 오기나 올 낀지….”여든셋 묵실띠기 아지매가 밭고랑에 앉아 내뱉는 이 말에 누가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경남 산청군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도 1970년대 이촌향도 바람이 불었고, 점차 주민이 줄었고, 농산어촌 작은 학교 통폐합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이 일대 하나뿐이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때 서너명 마을 아이들은 노란 학교 버스를 타고 면 소재지 학교로 다녔고 그마저도 몇년이 지나서는 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마을에서는 어린이를 보기 힘들게 됐다. 한때 100가구가 훨씬 넘고 주민 수가 500명이 넘었다지만 지금은 40가구 정도에 50여명의 노인들만 살고 있.. 2019. 8. 22.